언밸런스

밀린 웹툰 끝. 홀드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방 안이 어두워졌다. 휴대폰을 머리맡에 놓은 뒤 몸을 돌려 정자세로 누웠다. 새벽 한 시. 방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지도 벌써 두 시간째인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폰 놓고 아무 생각이나 하다 보면 잘 수 있겠지. 눈을 꼭 감은 채 천천히 생각의 흐름에 집중했다. - 단추 좀 풀어줘. 잘 수 있긴 개뿔, 눈...

복잡한 마음으로 나와서 걷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택시나 버스를 탈 생각도 못하고 그냥 냅다 걸었더니 어느새 집까지 반 정도 와있었다. 체감상 5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거리를 보면 20분은 족히 걸었을 위치였다. 택시를 잡을까 하며 멍하니 차도를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좀 덥긴 하지만 못 걸을 정돈 아니다. 생각 정리하는 셈 치고 좀 걷지 뭐. ...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내 얼굴 위로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걷어내던 유기현의 손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마와 눈, 뺨 주변이 간지럽도록 닿아있던 머리카락, 그걸 천천히 걷어 올리던 유기현의 손길, 조심스럽게 귓바퀴를 스치던 손끝, 머리카락이 넘어가며 시원해지던 느낌, 마지막으로 얼굴에 와닿던 유기현의 시선까지. 그뿐만 아...

“아, 진짜 수업 듣기 싫다.” “갑자기?” 강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늘어놓는 불평에 나연이가 피식 웃었다. “넌 좋아?” “당연히 싫지. 근데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자체 휴강 때릴까.” “오, 기말 직전에? 김여주 되게 용감하네.” 힝입니다. 가방은 열지도 않은 채 입술만 삐죽대는데, 프린트물을 꺼내놓던 나연이가 나를 툭 쳤다. “유기현 없어서 ...

“갔다 올게. 넌 좀 누워있어.” 김여주가 간호사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간 뒤, 음료수 캔을 비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김여주가 마시던 건 아직 반도 넘게 남았길래 그냥 내버려 두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김여주가 누워있으라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던 것을 떠올렸다. 사람이 갑자기 많이 타길래 김여주 앞에 섰고, 거리가 ...

마주 앉아 도시락을 먹을 땐 다행히 아까처럼 어색하지는 않았다. 감정이 좀 가라앉은 상태라 사고 났던 얘기 좀 더 자세히 듣고, 유기현이 형사 만난 얘기도 듣고, 평소처럼 쓸데없는 얘기도 좀 하고. 밥을 다 먹고 도시락을 치우려는데 옆에서 유기현도 거들겠답시고 사부작거린다. 오른손엔 깁스, 왼손엔 링거 호스를 달고서 뭘 치우겠다는 건지. 호스 줄 때문에 정...

처음으로 와보는 병원 1인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다. 침대는 창가에 붙어 있었고, 병실 한가운데엔 부잣집의 응접실처럼 테이블과 소파, 텔레비전까지 놓여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여전히 코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채 내 얼굴을 빤히 살피는 유기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또 우는 걸까 봐 신경 쓰는 거겠지. 그 시선...

토요일이라 알람을 꺼놓고 잤더니 한 시가 다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들은 유기현 목소리가 또 떠올랐다. 이렇게 기분 더러운 기상은 또 처음이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밥 시켜먹고, 웹툰 보고, 드라마 보고, 넷플릭스 보고, 또 밥 시켜먹고, 게임하고. 그러는 동안 유기현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

강의실은 5층이었지만 처음부터 계단을 선택하기로 했다. 강의 시작 직전의 만원 엘리베이터에 끼어 타봤자, 어차피 3층 언저리에서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역시 여유롭게 다니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오늘은 어쩌다보니 딱 맞춰 오긴 했지만.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김여주를 발견했다. 옆에 내 자리를 잡아둔 채...

수업이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끝나는 바람에 카페까지 급한 걸음으로 와야했다. 약간 가빠진 호흡을 다듬으면서 자동 유리문 옆의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카페 안에 고여있던 에어컨의 냉기가 온몸으로 쏟아지자, 맺혀있던 땀방울이 식으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주헌이가 먼저 발견했다. "누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주헌...

유기현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을 땐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안겨 보니 후회하기엔 너무 좋았으니까. 그러나 후회 안 하는 건 안 하는 거고, 쪽팔린 건 쪽팔린 거다. 내일 유기현 얼굴 어떻게 보냐... 아니 내일이 뭐야 당장 방금 전에도 유기현 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얼굴 빨개진 거 창...

그날 이후로 유기현은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아는 티'를 조금 덜 냈다. 솔직히 너무 대놓고 놀리지만 않으면 상관 없는데, 신경써서 조심하려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때 너무 오바해서 화냈나 싶은 생각이 조금 들긴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여유는 없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이번 중간고사 기간 때는 유기현하고 같이 공부하는...